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울리히 츠빙글리 (문단 편집) == 사상 == 일찍 죽고 츠빙글리의 운동이 사실상 칼뱅파에 흡수된 탓에, 츠빙글리의 사상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인데, 역시 같은 [[개신교]] 운동가이기는 하지만 [[마르틴 루터]], [[장 칼뱅]]과는 사상 면에서 차이가 적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마르틴 루터]]와는 '은총'과 '성찬'의 해석으로 갈리게 된다. 츠빙글리는 인간의 태도 역시 신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츠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를 단순한 '상징'으로 보았으며 기존 [[가톨릭]]의 [[미사|성변화]] 교리(화체설)를 부정했다. 이것이 일명 기념설이며, 이 기념설이 루터와 결별하는 결정적인 차이가 되었다. 루터도 화체설 자체는 부정했지만, 츠빙글리와 달리 '''보이지 않게 몸과 피가 임재한다'''는 일명 '공재설'을 주장했다. 또한 종군 때의 경험으로 인해 용병제도와 숙박업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생각들은 [[장 칼뱅]]에게도 이어져서 스위스의 주요 산업이 '''손목시계 등의 정밀공업 위주로 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츠빙글리와 장 칼뱅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츠빙글리는 구체적인 대안도 없이 무조건 금지부터 하여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장 칼뱅은 반대는 하였어도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고 그 방안의 실현에 힘쓴 결과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장 칼뱅의 무시무시했던 일화들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놀라운 일. 칼뱅교가 스위스를 넘어 전 유럽으로 세력을 키웠지만 츠빙글리는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 나중에 결국 칼뱅교에 흡수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것도 여기서 이유가 나오는 것이다. 그나마 츠빙글리는 당대의 종교 개혁에 대한 진심만큼은 인정받아서 선구자 정도의 대접은 받는다. [[예배]]에서 전례음악도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하여 폐지하였다. 정확히는 [[파이프오르간]] 등의 악기와 형식화된 기도문을 금지한 것으로 찬송가 자체는 악기 없이 [[아카펠라]]로 불렀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기독교)|성인]] 공경 역시 성경에 없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 점은 루터, 칼뱅도 마찬가지. [각주] [[분류:1484년 출생]][[분류:1531년 사망]][[분류:스위스의 가톨릭 신부]][[분류:개신교 신학자]][[분류:종교 개혁가]][[분류:전쟁 사망자]][[분류:장크트갈렌주 출신 인물]][[분류:빈 대학교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